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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7 나와의 싸움, 누벨바그


영화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진 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누구나 ‘누벨바그(Nouvelle vague)’라는 단어는 한번쯤 들어보았음직하다. 하지만 정작, ‘누벨바그’라는 단어를 명확히 정의 할 수 있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더 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누벨바그에 대한 정의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우리는, 단편적인 영화적 지식이나 몇몇 유명 감독들의 작품만으로 누벨바그를 정의하려 하는 오류들을 흔히 접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이런 방법으로 누벨바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접근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렇다면 누벨바그의 참 이해를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누벨바그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21세기의 우리는 누벨바그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누벨바그’는 「렉스프레스(L'Express)」라는 프랑스의 한 주간지 기자였던 ‘프랑수아즈 지루’에 의해, 1957년에 만들어진 단어다. 프랑스어로 ‘New Wave’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그 연원에서도 알 수 있듯 애초부터 영화학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닌 저널리즘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누벨바그가 ‘영화 사조의 변화’라는 단순한 의미를 뛰어넘어, 1950년대의 프랑스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ㆍ문화적인 흐름’이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즉 누벨바그는 영화사로서의 문제이기 이전에,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적 흐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벨바그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프랑스 사회와 정치적 헤게모니를 먼저 이해해야 하며, 누벨바그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개혁적 사유와 철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Ⅱ

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은, 정치는 물론이고 문화 전반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탈리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전후 당시, 황폐화된 도시와 실업율의 증가로 인한 피폐한 모습을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이 때 생겨난 사조가 바로 ‘네오-리얼리즘’이다.
당시의 촬영은 제작 자금과 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영화에 필수적인 조명이나 세트ㆍ스타급 배우의 기용 대신, 자연광과 로케이션ㆍ아마추어 배우를 이용해 이루어졌다. 네오-리얼리즘의 이러한 촬영 정신은, 열악한 상황을 뛰어넘는 예술 정신으로서의 의의 뿐 아니라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서 사회와의 관계를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당시 정부가 쉬쉬하던 이탈리아 시민의 피폐함이 화두로 오르게 되었다는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가상의 공간이었던 프레임 속에,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투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누벨바그가 태동하는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누벨바그의 감독들은 네오-리얼리즘에서 사용한 자연광ㆍ로케이션 등의 촬영 기법을 차용했다. 그들이 네오-리얼리즘에 대해 특히 높게 산 것은 ‘리얼리즘’이라는 사유였는데, 여기서의 리얼리즘이란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누벨바그의 감독들이 가장 혐오했던 바였다. 이에 대해서는, 장 뤽 고다르가 ‘점프 컷’을 통해 영화 전반의 컨티뉴어티를 무너뜨림으로써 ‘영화는 현실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일 뿐이다’라고 관객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음을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향하는 ‘리얼리즘’이란 어떤 것인가.

1954년 1월, 알제리 전역에서 인민해방전선(FLN)의 전사들이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알제리 전쟁이 시작된다. 그 해 10월 프랑스는 알제리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근 8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전쟁이 계속됐다. 그러나 프랑스 내에서, 이 일그러진 전쟁에 대한 반성과 고찰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검열 등의 이유로 인해, 1955년 이후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알제리 전쟁에 대해 다룬 프랑스 영화는 전체 영화 중 단 1%에 불과했던 것이다. 조르주 사둘은 이에 대해 “알제리 전쟁이 진행되는 7년 동안 어떤 장편 영화도 그 근본적인 문제를 공개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1960년에 와서 121명의 예술가들이 정부에 대해 성명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알제리 민중에게 가해지는 공격 행위에 반대하고 프랑스 민중의 이름으로 억압받는 알제리인들을 돕자는 것이었다. 이에 서명했던 예술인에는 프랑소와 트뤼포, 알렝 레네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곧, 영화를 통해서도 드러났다. 예컨대, 장 뤽 고다르의 ≪작은 병정 Le petit soldat≫이나 자크 드미의 ≪쉘부르의 우산 Les parapluies de Cherbourg≫등이 이런 움직임에서 제작된 영화 들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영화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질로 폰테코르보의 ≪알제리 전투 La Battaglia Di Algeri≫와 비교하면서, 그들의 영화를 프랑스인의 타자적 시각에서 바라 본 비객관적인 소산물에 불과하며, 알제리인의 실상을 비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하는 것이 그러한 시각에서의 비평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당시, 검열 강화 정책으로 인해 질로 폰테코르보의 그것처럼 직접적인 내용들을 다룰 경우 모두 삭제되기 십상이었다는 점이나, 오랜 침묵과 사회적 압박을 깨고 예술인 스스로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일어났다는 점 등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움직임을 단편적인 소극적 의사 정도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1966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알제리 전투≫의 황금사자상 발표에 대해 반발하며 프랑스의 영화 관계자들이 집단 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리에 남아 박수를 쳤던 것은 누벨바그 감독 프랑소와 트뤼포뿐이었다.
결론적으로 누벨바그 감독들은, 네오-리얼리즘의 그것처럼 거칠고 직접적인 방법 또는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리얼리즘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회적 상황에 의한 인간 내면의 모습이나 존재에 대해 다룸으로써 다른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을 이루어 냈고, 이는 누벨바그 감독들이 정신적 스승으로 추앙하던 앙드레 바쟁의 리얼리즘 이론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Ⅲ 

사회적 측면에서의 누벨바그 영화는 이처럼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개혁’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 하자면, 감독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어떠한 철학적 사유가 그들의 작품을 통해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남이 써준 시나리오를 가지고 카메라만 돌리는 ‘수동적 의미의 감독’이 아닌,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마치 글을 쓰듯 촬영을 해나가는 ‘작가적 감독’으로의 전환을 의미하고, 이것이 바로, 누벨바그에서 가장 중시했던 ‘작가주의 (Politique des Auteur)’ 정신이다.

작가주의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954년「까이에 뒤 시네마」1월호를 장식했던 프랑소와 트뤼포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논문을 통해서였다. 감독의 창조적 개성을 반영한 영화가 진정한 영화라고 이야기한 이 논문은, 일관된 주제를 가지고 영화 속에서 꾸준히 탐구하는 감독을 ‘작가(Auteur)’로 규정했다. 사실, 누벨바그 감독들 모두가 스스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시나리오의 일부에 참여하는 최소한의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작품 자체에 개입하였으며, 이를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이러한 작가주의의 확산은, 격하되었던 헐리웃 영화감독에 대한 재평가로도 이루어졌다. 클로드 샤브롤과 에릭 로메르가 히치콕을 진정한 작가로 평가하는 책자를 쓴 것을 계기로, B급 감독으로 치부되던 히치콕에 대한 격상이 이루어진 것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히치콕의 영화들은, 굳이 감독의 이름을 대지 않아도 그의 영화임을 짐작케 하는 어떤 색(色)을 가지고 있다. 숨 막히는 서스펜스적 요소라든지, ‘맥거핀’이라 불리는 추리상의 함정 장치 같은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다르와 트뤼포ㆍ로메르 등의 누벨바그 감독들은 각자의 개성을 투여한 방식의 촬영 기법과 각자의 철학적 플롯으로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들이 작가주의를 지키기 위해 사용한 여러 방법 중에서는 다음의 공통분모를 꼽아 볼 수 있다.  

우선, 누벨바그 영화들은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싸게 찍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영화는 자금을 투자한 제작자의 제약 하에서 촬영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누벨바그 감독들은 이를 거부하고 감독 자신의 의지대로 영화를 촬영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출에 있어 유연성을 획득한 이들 영화는, 흥행에까지 성공을 거두게 됐고 이는 누벨바그 감독들을 스타덤에 올리는 계기로까지 작용한다.
둘째로, 자연광의 사용과 로케이션 촬영을 들 수 있다. 이는 네오-리얼리즘의 재현이자, 이전의 방식과는 다르게 촬영하고자 했던 의도적인 뉴웨이브적 성격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촬영 방식은, 스튜디오에서의 작위적 촬영에 비해 리얼리즘을 부가하는데 있어서도 단연 효과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누벨바그 감독들은 ‘즉흥성’을 미학적 요소로 사용했다.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의 틀에 맞춰 정형적으로 촬영되던 기존의 방식을 탈피한 즉흥적 연출은,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우연적 요소와 결합됨으로써 감독이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미학을 가능케 했다. 예컨대 로케이션 촬영을 함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현장음을 삽입해 깨끗하지 않은 음향을 흘려 보내는 기법은, 과거 현장음을 삭제해서 배우들의 대사만을 깨끗하게 내보내는 방식과 대비되어, 어지럽고 잔혹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도, 배우에게 직접 즉흥적 대사를 치게 한다든지, 아무런 주문 없이 배우 스스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는 등의 즉흥적 연출이 자크 로지에의《아듀 필리핀》, 자크 리베트의《셀린느와 줄리, 배를 타다》, 에릭 로메르의《녹색 광선》등을 통해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좀 더 심도 있게 해석하자면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치로 이해 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앞서 거론한 누벨바그의 리얼리티로 연결되는 알고리즘 역할로까지 도착된다.
마지막으로 감독의 실험적 촬영 기법을 들 수 있다. 여기서의 촬영 기법이라 함은, 오손 웰즈가 《시민케인》에서 사용한 ‘딥 포커스’ 같은 수려한 테크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실험적인 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컨대, 트뤼포의 《피아니스트를 쏴라》에서는 카메라가 의도적으로, 주인공도 아닌 사람을 2분 이상이나 따라 다니며 프레임에 담는다. 뿐만 아니라 고다르는, 난데없는 점프 컷이나 프리즈 프레임으로 플롯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끊어 버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기법 시도는, 이전의 촬영 기법이 좀 더 매끄럽고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이루어진 것과는 완전히 다른 효과를 의도한다. 즉 영화의 흐름을 깨버리고 극은 거칠게 만들어 버려서, 결국에는 그야말로 ‘영화 같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 버리는 것이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효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런 효과를 의도한 것일까.  


Ⅳ 

누벨바그의 감독들은 영화를 ‘영화’로 생각하지 않고 ‘실제’라고 생각했던 관객들의 무지함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영화 같지 않은 영화’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영화는 감독의 눈으로 조작된 것이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심지어는 객관적이라 믿었던 ‘다큐멘터리’조차도 감독의 눈으로 재해석 된 것이기 때문에, 감독의 의도적 장치가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초의 다큐멘터리였던 로버트 플래허티의 《북극의 나누크》에서는 에스키모인의 생활을 감독이 의도한대로 끼워 맞추기 위해 작위적 상황을 연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의식의 변화를 이끌고자 한 움직임은, 영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기 이전에 이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의 출발이었다. 끊임없는 비판과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진실과 진리가 드러났고 그만큼 관객의 수준은 향상되었으며, 영화가 진정한 의미의 제7의 예술로서의 두각을 드러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는 단순히 보고 즐기기만 했던 영화가, 논의하고 비판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으로 거듭난 것이다.   

‘진정한 적은 자기 자신이다’라는 칭기즈칸의 어록이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진실이라고 한번 단정 지은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의심하려들지 않는다. 이러한 습관은 작게는 개인의 무지(無知)에서 크게는 사회 전체의 무지로 이어지게 되고, 단순한 학습의 부재에서 극단적으로는 정치 권력적인 악용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 ‘이미 규정되어진 그대로를 비판력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이 바로 누벨바그가 지양하고자 했던 최대의 악습이었으며, 작가주의와 실험적 촬영이 지향한 귀결점일 것이다. 시대적 흐름에 순행하지 않고 당당하게 역행을 선언하여, 오히려 그 방향을 순행으로 이끌어 냈던 누벨바그.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비판도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수많은 현대인에 있어, 누벨바그는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닌 지금 당장 실행되어야 할 자기 자신과의 싸움 일 것이다.


참고 문헌 

류상욱, 「영화의 철학과 미학-프랑스 영화학의 경향」, 철학과 현실사
스티븐 디 캐츠(김학순ㆍ최병근 옮김), 「영화 연출론: 개념에서 스크린까지의 시각화」, 시공사(주)키노네트,「KINO 中 알제리, 누벨바그의 정신-유럽바깥에서 질문하는 타자」류상욱, 1999년2월호
문화학교 서울, 1996,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영화탄생 100주년 기념 걸작 100선」, 문화학교 서울루이스자네티(김진해 옮김),「영화의 이해: 이론과 실제」, 현암사
장 피에르 장콜라(김혜련 옮김), 「프랑스 영화사」, 동문사
워렉 벅렌드(장석용·정재우 옮김),「영화연구」, 현대미학사, p.161~190
전찬일, 세계 영화사 강의, 디지털 문화 예술 아케데미 Artnstudy, 동영상강의 9강 참조, http://www.artnstudy.com/
<씨네 21 영화 정보> http://www.cine21.com/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야후 코리아 백과사전 http://kr.dic.yahoo.com/search/e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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