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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3.17 진실과 모순의 의도적 공존,<생활의 발견>

생활의 발견 상세보기



현대 사회에서 진실과 허상의 구분은 모호한 것일뿐더러 무의미하기까지 한 문제다.

아름다운 허상에 비해 실상은 도리어 추하기 때문에 실상은 허상을 탐하고 뒤섞인다.

그 결과 허상과 실상, 또는 예술과 현실 사이의 구분은 더 이상 이분법적인 체계로는 설명키가 어렵게 되었다.

확언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름다운가(쾌한가)’ 또는 ‘아름답지 않은가(불쾌한가)’에 대한 문제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진실하지 않은가’ ‘진실 한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연극배우인 경수는 영화에 출연하지만 흥행이 영 시원찮다.

차기작 출연이 무산되자 몇 푼 안 되는 러닝 개런티를 챙겨 나오는 경수.

허허한 그는 언제 한번 놀러 오라던 선배 성우의 전화를 기억하고 무작정 춘천으로 내려간다.

술로 진탕 회포를 푼 성우와 경수는 이튿날 소양호를 찾는다.

소양호를 건너는 배 안에서 청평사 회전문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성우.

그러나 성우가 불편한 지인과 마주치면서 회전문은커녕 청평사 근처에도 못가고 둘은 그냥 돌아 나온다.

시내로 돌아와 성우는 경수의 팬이라는 명숙을 소개하고 셋은 동행한다.

명숙의 노골적인 호의에 끌려 경수는 섹스까지 하게 되지만, 초면부터 사랑한다 말해 달라는 그녀는 어쩐지 부담스럽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숙이 성우와 만나고 있던 사이임을 알게 된 경수는 고향집 부산으로 향한다.

경부선 열차에 오른 경수. 그런데 옆 좌석에 앉은 선영이 힐끗대며 경수를 쳐다본다.

잠시 후 그녀가 아는 체하며 말을 걸어오자 경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생활의 발견>은 홍상수의 네 번째 영화다.

그의 영화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 영화 역시 드라마틱한 시퀀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은 너무 진짜 같아서 불편할 정도다.

거대한 캔버스에 뭣도 아닌 ‘일상’ 그 자체를 담아냈던 마네를 떠올려보라.

당시의 관습상 그 정도의 규모라면 나폴레옹의 대관식 정도를 담아내야 마땅했거늘

마네가 주목한 일상은 너무 초라한 타이틀이었다.

때문에 마네의 수작들은 불편함을 호소하는 관객들 앞에 냉대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순전히 습관 탓이었던 것이다. 홍상수 영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미리 거론했듯 이 영화는, 우리가 영화에게 으레 기대해왔던 평균적 미(美)의 기준을 비껴나 일말의 진실(또는 현실)로 읽힌다.

경수가 며칠간 겪은 일탈은 우리 중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니까.

하지만 감독은 이 적적한 이야기의 마디마디에 진실성을 전복시킬 요소들을 배치한다.

그 요소들로 인해 영화의 현실성은 모순으로 탄로 나고, 더불어 영화가 모사하고 있던 ‘실제 세계’에까지 모순성이 연쇄된다.

나는 이 요소들을 ‘트릭’이라 부르도록 한다.

 

 

이 영화의 트릭 중 몇 가지는 이미 기존의 평을 통해 거론된 적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세 번째 에피소드의 자막이 갖는 모순이다.

영화는 중간 자막을 넣어 총 7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있다.

가령, 한 번 놀러오라는 성우의 전화를 받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경수가 성우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다’라는 자막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명숙이 경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다’라는 세 번째 에피소드는 뭔가 이상하다.

상기의 에피소드에서 명숙은, 경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담론이 불거지는 것은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다. 언어와 영상의 의도적인 불일치다.

또 다른 트릭은 성우가 전하는 회전문에 대한 전설이다.

그는 공주를 감싸고 있던 뱀이 돌아 나와 ‘도망간 곳’이 회전문이라고 설명하지만,

뱀이 번개를 맞고 ‘죽은 곳’이라는 것이 원래 전설의 내용이다.

전설의 내용은 청평사 초입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이 전설을 굳이 영화에 삽입하고자 했던 감독이 그 내용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설명을 하게 했다는 것인데,

이는 마지막 에피소드(이 에피소드의 자막은 ‘경수가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다’이다)와의 알고리즘 형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일 게다. 여기까지가 기존의 평론이 짚어 낸 부분이다. 그런데 트릭은 아직 더 남아있다.

 

 

하나는 두 번째 에피소드의 자막.

‘경수가 영화사에 가서 감독과 말다툼을 하다’라는 자막은 경수와 대화를 나누는 사내를 ‘감독’으로 단정 짓게 만든다(실제로 많은 평에서 사내는 ‘감독’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그는 감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경수를 향해 ‘사람 되긴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고 한마디 던지는 그에게 경수는 이렇게 반문한다.

“형이 뭐야? 감독이야 뭐야?” 만약 사내가 감독이었다면 차라리 ‘감독이면 다야?’라는 대답이 옳다.

앞서 말한 세 번째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착각을 유도하는 의도적 트릭인 것이다.
마지막 트릭은 경수가 선영의 남편에게 쓴 고발장에 있다.

그는 선영이 자신에게 남기고 간 쪽지를 고발장 밑에, 방금 막 따온 감 한 개를 고발장 위에 위치시키고는 감 옆에 ‘≠감’ 이라고 적는다. 이는 흡사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연상시킨다.

감이 더 이상 감이 아니라는 것은 선영의 남편 역시 그녀가 생각했던 그가 아니라는 모순성을 부각한다.

그뿐 아니라 실상의 ‘감’과 언어로써의 ‘감’ 간의 불일치를 확장시켰을 때,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일상이라 믿었던 이 ‘영화’간의 불일치 역시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현실에 대한 진정성 따위는 존재 하지 않았던 것이며, 영화가 담은 진실과 허상 자체가 모순이었던 셈이다.

 

 

도덕경 81장에는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는 구절이 있다.

‘진실한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생활의 발견>은 ‘진실한 영화’다.

그러나 단조로운 내러티브는 트릭으로 인해 전복되고 진실은 곧 파괴된다.

현실과 모사의 모호, 그리고 ‘진실’이라는 화두 자체의 모순. 이것이 홍상수가 말하는 생활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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