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머지 않은 곳에 근처에서 보기 드문 카페가 있다는 사실을 검색을 통해 알게 됐다
'피스오브마인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평온하고 고즈넉하면서도 세련된 이곳은
모 기업 CEO로 있던 사장님이 은퇴 후 빵 굽는 부인분과 같이 운영하고 있다
여기 있는 책은 모두 사장님의 서재에 있던 것이라고 하는데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다방면으로 박식하신 듯 하다




식사도 할 수 있지만 간단한 빵과 허브티가 이 집의 기본 식탁이다
빵은 우드 트레이에 가지런히 놓여 나온다 색별로 맛이 다 다른데, 특이하게 십전대보탕을 넣은 빵도 있다
함께 제공되는 잼을 얹어 먹으면 한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배가 든든하다
(사진은 위부터 바나나+초코잼, 오렌지잼, 올리브+발사믹식초, 이외에도 딸기잼, 버터등이 더 제공된다)




허브티의 종류도 다양해서 올때 마다 골라 마시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사진에 보이는 허브티 전용 머그와 종류별 허브는 따로 구입할 수도 있다
머그는 8천원 가량, 허브는 만원 안팎인데, 나는 작년 겨울쯤 카모마일을 구입해서 아직까지도 요긴히 마시고 있다
저렴한 와인도 많이 구비되어 있는데 선호하는 탄닌 함유등의 취향을 이야기 하면 직접 추천해 주신다




개인적으로 이 집에서 가장 추천하고픈 그리시니(Grissini)
이 빵은 식사 주문시 제공되고 단품으로는 팔지 않는다
기본 제공 이외에 더 원할 경우 개당 천원씩 내고 더 먹을 수 있는데, 나는 갈 때 마다 항상 두개씩 더 먹는다
한번은 집에 싸 온 적도 있는데 아뿔싸 그리시니는 식으면 밀가루 반죽에 불과한 거였다 그것도 아주 질기고 찰진 밀가루 반죽 -_-
금방 오븐에서 나온 그리시니는 그야말로- 안먹어봤으면 말을 말아야 할 풍미를 자랑한다




페타 치즈와 부추를 담뿍 얹은 샐러드
사실 처음에는 왠 부춘가 싶었는데 향이 은근히 잘 어울리길래 나중에 혼자 샐러드 먹을 때 따라 만들곤 했다




안심 스테이크와 굴소스 스파게티
스테이크는 호주산인지 뉴질랜드 산인지 그랬던 것 같은데 어쨌거나 미국산은 안쓰신단다 그럼 됐지 무어
난 아스파라거스는 질색인데 이 거 먹을 때는 그냥 고기 한저름에 아스파라거스 반덩이씩 해서 꿀떡꿀떡 넘겼다
굴소스 스파게티도 간간-한 것이 맛있다 이 집 요리는 전체적으로 허브가 많이 사용돼서 향긋한게 매력!



크림 스파게티도 정말 맘에 드는 메뉴다
느끈한 맛 없이 끝까지 고소하게 먹을 수 있다 사진부터가 벌써 담백한 느낌이지 않은가? 호호




항상 일반 크림 스파게티만 먹다가 먹물 스파게티를 시켜봤는데
먹물 소스가 아니라 먹물로 만든 면을 사용한 거였다 일반 파스타에 비해 더 쫄깃하긴 한데
소화력이 어르신 뺨치도록 약한 나로서는 오히려 그냥 그랬다




핏자는 얇은 도우와 두꺼운 도우 중 하나를 선택 할 수 있다 (값은 동일)
얇은 도우는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바삭하게 먹을 수 있다
두꺼운 핏자는 빵 위에 토핑을 얹은 식이었고, 빵 자체는 부드러운데 겉만 바삭하게 구워내서 식감이 특이했다


→ 얇은도우


↓ 두꺼운 도우



후식으로 제공 된 셔벗
계절에 따라 수박 등의 제철 과일을 내주시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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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안

맛, 있는 집 2010. 3. 17. 19:36





모름지기 뮤직부스 정도는 있어야 커피샵이라 할 수 있는겨
뭐, 정작 LP는 전시용이고 인터넷으로 틀어주시는가 싶기도 하다만
뭣보다도 커피가 정말 맛있는 진짜 커피집
금방 볶은 여러 원산지의 원두도 따로 구입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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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상세보기



현대 사회에서 진실과 허상의 구분은 모호한 것일뿐더러 무의미하기까지 한 문제다.

아름다운 허상에 비해 실상은 도리어 추하기 때문에 실상은 허상을 탐하고 뒤섞인다.

그 결과 허상과 실상, 또는 예술과 현실 사이의 구분은 더 이상 이분법적인 체계로는 설명키가 어렵게 되었다.

확언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름다운가(쾌한가)’ 또는 ‘아름답지 않은가(불쾌한가)’에 대한 문제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진실하지 않은가’ ‘진실 한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연극배우인 경수는 영화에 출연하지만 흥행이 영 시원찮다.

차기작 출연이 무산되자 몇 푼 안 되는 러닝 개런티를 챙겨 나오는 경수.

허허한 그는 언제 한번 놀러 오라던 선배 성우의 전화를 기억하고 무작정 춘천으로 내려간다.

술로 진탕 회포를 푼 성우와 경수는 이튿날 소양호를 찾는다.

소양호를 건너는 배 안에서 청평사 회전문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성우.

그러나 성우가 불편한 지인과 마주치면서 회전문은커녕 청평사 근처에도 못가고 둘은 그냥 돌아 나온다.

시내로 돌아와 성우는 경수의 팬이라는 명숙을 소개하고 셋은 동행한다.

명숙의 노골적인 호의에 끌려 경수는 섹스까지 하게 되지만, 초면부터 사랑한다 말해 달라는 그녀는 어쩐지 부담스럽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숙이 성우와 만나고 있던 사이임을 알게 된 경수는 고향집 부산으로 향한다.

경부선 열차에 오른 경수. 그런데 옆 좌석에 앉은 선영이 힐끗대며 경수를 쳐다본다.

잠시 후 그녀가 아는 체하며 말을 걸어오자 경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생활의 발견>은 홍상수의 네 번째 영화다.

그의 영화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 영화 역시 드라마틱한 시퀀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평범한 일상은 너무 진짜 같아서 불편할 정도다.

거대한 캔버스에 뭣도 아닌 ‘일상’ 그 자체를 담아냈던 마네를 떠올려보라.

당시의 관습상 그 정도의 규모라면 나폴레옹의 대관식 정도를 담아내야 마땅했거늘

마네가 주목한 일상은 너무 초라한 타이틀이었다.

때문에 마네의 수작들은 불편함을 호소하는 관객들 앞에 냉대 받을 수밖에 없었다.

순전히 습관 탓이었던 것이다. 홍상수 영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미리 거론했듯 이 영화는, 우리가 영화에게 으레 기대해왔던 평균적 미(美)의 기준을 비껴나 일말의 진실(또는 현실)로 읽힌다.

경수가 며칠간 겪은 일탈은 우리 중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니까.

하지만 감독은 이 적적한 이야기의 마디마디에 진실성을 전복시킬 요소들을 배치한다.

그 요소들로 인해 영화의 현실성은 모순으로 탄로 나고, 더불어 영화가 모사하고 있던 ‘실제 세계’에까지 모순성이 연쇄된다.

나는 이 요소들을 ‘트릭’이라 부르도록 한다.

 

 

이 영화의 트릭 중 몇 가지는 이미 기존의 평을 통해 거론된 적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세 번째 에피소드의 자막이 갖는 모순이다.

영화는 중간 자막을 넣어 총 7개의 에피소드로 나뉘어 있다.

가령, 한 번 놀러오라는 성우의 전화를 받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경수가 성우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다’라는 자막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명숙이 경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다’라는 세 번째 에피소드는 뭔가 이상하다.

상기의 에피소드에서 명숙은, 경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담론이 불거지는 것은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다. 언어와 영상의 의도적인 불일치다.

또 다른 트릭은 성우가 전하는 회전문에 대한 전설이다.

그는 공주를 감싸고 있던 뱀이 돌아 나와 ‘도망간 곳’이 회전문이라고 설명하지만,

뱀이 번개를 맞고 ‘죽은 곳’이라는 것이 원래 전설의 내용이다.

전설의 내용은 청평사 초입에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기 때문에,

이 전설을 굳이 영화에 삽입하고자 했던 감독이 그 내용을 몰랐을 리는 없다.

의도적으로 잘못된 설명을 하게 했다는 것인데,

이는 마지막 에피소드(이 에피소드의 자막은 ‘경수가 회전문의 뱀을 떠올리다’이다)와의 알고리즘 형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일 게다. 여기까지가 기존의 평론이 짚어 낸 부분이다. 그런데 트릭은 아직 더 남아있다.

 

 

하나는 두 번째 에피소드의 자막.

‘경수가 영화사에 가서 감독과 말다툼을 하다’라는 자막은 경수와 대화를 나누는 사내를 ‘감독’으로 단정 짓게 만든다(실제로 많은 평에서 사내는 ‘감독’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그는 감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경수를 향해 ‘사람 되긴 힘들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고 한마디 던지는 그에게 경수는 이렇게 반문한다.

“형이 뭐야? 감독이야 뭐야?” 만약 사내가 감독이었다면 차라리 ‘감독이면 다야?’라는 대답이 옳다.

앞서 말한 세 번째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착각을 유도하는 의도적 트릭인 것이다.
마지막 트릭은 경수가 선영의 남편에게 쓴 고발장에 있다.

그는 선영이 자신에게 남기고 간 쪽지를 고발장 밑에, 방금 막 따온 감 한 개를 고발장 위에 위치시키고는 감 옆에 ‘≠감’ 이라고 적는다. 이는 흡사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연상시킨다.

감이 더 이상 감이 아니라는 것은 선영의 남편 역시 그녀가 생각했던 그가 아니라는 모순성을 부각한다.

그뿐 아니라 실상의 ‘감’과 언어로써의 ‘감’ 간의 불일치를 확장시켰을 때, 우리의 ‘일상’과 우리가 일상이라 믿었던 이 ‘영화’간의 불일치 역시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현실에 대한 진정성 따위는 존재 하지 않았던 것이며, 영화가 담은 진실과 허상 자체가 모순이었던 셈이다.

 

 

도덕경 81장에는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信言不美 美言不信)’는 구절이 있다.

‘진실한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생활의 발견>은 ‘진실한 영화’다.

그러나 단조로운 내러티브는 트릭으로 인해 전복되고 진실은 곧 파괴된다.

현실과 모사의 모호, 그리고 ‘진실’이라는 화두 자체의 모순. 이것이 홍상수가 말하는 생활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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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자들의 도시

CINEMA 2010. 3. 1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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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이 시력을 잃은 황망한 도시에 유일하게 눈 뜬 여인이 있다. 을씨년스런 설정 속에서, 프레임은 그녀의 눈을 통해 비춰지고 관객은 내내 불편한 진실을 관조하게 된다. 

차례로 시력을 잃어가는 무리 속에서 홀로 눈을 뜬 여인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추악(醜惡) 그 자체다. ‘본다는 것’을 잃은 인간들은 ‘보여 지는 것’을 포기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고, 이는 곧 모럴 해저드로 이어진다. 눈먼 자 가운데 군림하려는 집단의 생성과 그 체제 안에서 행해지는 약탈, 강간 등의 행위는 인간의 본성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인간의 부정적 본성을 파헤친다는 내러티브 자체는 클리셰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여전히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 영화 특유의 설정 덕이다. 영화 속의 유일한 눈인 여인의 시선은 카메라의 시선이 되고, 그 시선은 곧 관객의 몫이 된다. 까닭에 감정 이입이 용이해져 관객은 영화 속 충격적인 상황에 그대로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의 원작 소설이 보여 준 풍부한 감정 묘사가 생략된 탓에, 영화는 사건의 단순한 나열에 그치고 말았다. 예컨대,「비참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자… 그녀의 용기가 부서지면서 점차 그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소심한 선교사처럼 돌아다니느니 차라리 눈이 머는 게 나을 거야」등의 텍스트는 여인의 심리 변화를 부각시켜, 이 후 그녀가 보인 일련의 행동에 개연성을 부과한다. 그러나 영화는 여인의 심리 묘사보다 미장센 자체에 주목한 나머지, 부적절한 폭력에 무능하게 대응하는 여인을 방조자에 가깝게 그려내고 있다. 때문에 관객은 이에 대해 묘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 영화에 대한 거부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영화가 보여주는 미장센 자체는 소설 보다 뛰어나다. 단순 실명이 아닌 화이트 아웃에 가까운 실암(失暗)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영화 속 대부분의 배경을 흰색으로 사용하고 카메라 노출을 극단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공간과 공간 간의 경계가 불분명한 화이트 아웃이 적절히 연출되었고 소설은 읽은 독자라면 상상에 그쳤던,「눈을 뜬 채로 우유의 바다에 빠진 것처럼, 진하고 균일한 백색」을 영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여인은 다시 시력을 되찾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야기 한다. 이제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시력을 상실한 상태에 불과하며 단지 ‘눈은 멀었지만 보는 사람’과,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 존재 할 뿐이라고. 영화 속의 ‘눈’ 역시 단순 생물학적 시력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본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이성의 판단 요소로 연결되고 이를 반증하면 ‘시력의 상실’은 곧 위선의 카테고리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극단적 순간에서 쉽게 내팽겨지는 이성의 나약함. 우리는 지금, 과연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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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고 말하지 마라

CINEMA 2010. 3. 17.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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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인가 교육 방송에서 시리즈물로 방영되는 여행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그 날은 한 여인의 인도 여행기를 방송 중이었는데, 인도가 좋아 몇 번이고 인도를 여행 중이라는 그녀의 낙락한 모습에 사로 잡혀 채널을 고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송에서 유독 기억나는 장면은, 그녀가 갠지스 강변 사원 담장에 앉아 성스런 강에 목욕하는 힌두인들을 보며 한마디 던졌을 때다.
“저들은 저 강에 와서 몸을 씻는 것이 평생의 소원 중 하나래요. 그건 나에겐 아무것도 아닌 건데.”

 방학을 맞아 친척 누나(장주)에게 과외를 받으러 안동에서까지 올라 온 고3 장철은, 자신이 당연시하던 진리가 장주로부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짐에 혼란스럽다. 장철에게 있어 친구들의 흡연을 저지해 준 선생님은 존경의 대상이지만, 장주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흡연 가능한 지위인 성인과 청소년을 가로 짓는 모호한 경계선도 우스울뿐더러 그 잣대로 훈계하는 선생님은 모순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에 장철은 냉소적 태도일 뿐이라며 그녀의 사고방식을 거부 하지만, 그녀는 장철이 조금 더 넓은 눈을 가지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절대적 진리보다 각자가 가진 삶의 질서에 주목할 것을 조용히 권한다.  

이렇다 할 카메라 기법이나 플롯을 휘잡을 만한 큰 시퀀스는 없지만, 영화는 30분 남짓의 러닝타임 내내 장철과 장주의 소소한 대화를 통해 ‘타인과의 삶’이라는 다소 거대한 주제를 풀어 나간다. 장철은 무뚝뚝한 사투리로 조금은 보수적인 말들을 툭툭 내 던지곤 하는데, 단정적인 어조로 기정‘사실화’된 듯 한 그 말들은 장주를 통해 다시금 허상으로 흩어진다. 사실 정철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은, 12년 내내 보이는 만큼만 알고 아는 만큼만 믿도록 길들여져 온 우리네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함부로 단정 짓는 장철의 버릇은 어쩌면 소통의 부재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과천 인구는 몇이지?’등의 공허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장철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건 마치 그 간 긴 소통에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한 갈구로 보이지 않았는가.  

힌두인들이 성스러이 여기는 갠지스 강이 여행자에게는 한낱 더러운 물에 지나지 않듯 나의 진리가 타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 일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 그럼으로써 상대를 내 기준에 맞추려 하지 않는 것, 궁극적으로는 어떤 것에 대한 섣부른 단정을 지양하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몇 개의 메시지다. 이 메시지를 던지면서도 영화는, 마지막 씬에서 장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는 장주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드러낸다. 아마도 <안다고 말하지 마라>라 해놓고 아는 체 했음에 대한 미안함에서였을 게지만, 영화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에 비하면 이건 너무 사소한 사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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